Absence of negation

 
Cyartgallery, Chart space, Seoul
03.27-04.0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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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tos by Donghee Huh

언어적 체계가 무너진 곳으로부터 읽어내는 또 다른 대화의 세계에 대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입에서 귀로 의사를 전달하는 음성언어에 의한 상호작용 방식은 가장 원초적 형태의 매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초기 인간매체 단계를 시작으로 유무선의 기계적 방식을 넘어 현대의 첨단 디지털 매체에 이르도록 인간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혁신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의 소통의 질이 더 높아지고 소통의 깊이가 더 깊어졌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소통할 수 있는 범위는 점차 확장되었고 첨단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소통방식 역시 지속적으로 다양화 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사회가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에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그 첨단 매체는 사회 의식을 조작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종교, 인종, 이념 등의 문제로 사회 내의 의식이 집단적으로 대립적 구조 가운데 놓여있을 경우에는 배타적 선전도구가 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소통기술과 방법이 발전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소통의 질이나 깊이에 영향을 주는 본질적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에서 볼 때 인간 사회의 소통은 오히려 그러한 매체를 사용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가 변화하고 사회의 성숙도가 높아지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전우연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소통이 갖는 의미를 묻는 작업을 보여주게 된다. 그는 특히 ‘불편한 대답’이라는 명제의 노(No)와 네(Yes)라는 소리가 섞여 나오는 작업에서 인터렉티브 방식에 의해 관객이 접근할 때 이 모호한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된다. 작품 명제에 대답이라는 단어를 포함시킨 것을 보면 작가는 다른 이의 질문이나 요청에 대한 반응을 소리로 만들어 내고자 한 작업으로 보이는데, 작가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부정 혹은 긍정을 그 선택지로 한정하지 않고 노(No)와 네(Yes)의 사운드를 섞어 놓음으로써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선택지를 만들어 놓은 점은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작가는 이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고유한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서 집단적 사고에 대한 거부감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얼버무리는 듯한 소리는 무엇을 대답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긍정이나 부정으로 정확히 구분되는 대답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결국 소통 불능상태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 규칙에 벗어나 있는 듯한 이 새로운 소리는 질문자의 의사를 알아낼 수는 없겠지만 질문자의 음성이 갖고 있는 톤이나 특징이 무엇인지 더 상세히 듣게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질문자가 전달하는 언어적 규칙에 따른 의사 정보가 아니라 전달되는 정보에서 자유로운 소리 그 자체를 듣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내용이 타자가 자신의 의견을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수준에 한정된다면 깊이 있는 소통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소통에 있어 깊이 있는 소통 내용은 비언어적 요소들에 더 많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깊은 대화를 하기 원할 때 주로 음성만 전달하는 전화 등 통신수단을 이용하는 것보다 흔히 서로 만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는 점을 보면 인간에게는 언어로만 소통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은 만날 때 비로소 읽혀지는 요소들, 즉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서 해소될 수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전우연 작가는 작업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한정될 수 없는 인간의 의사 이상의 풍부한 것들이 인간에게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 내면의 생각과 감정 등 소통 영역의 경계를 확장시키고자 질문자가 한정하고 있을지 모르는 선택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동시에 언어적 체계의 한계마저 무너뜨리는 지점을 작업에서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의 필요성을 반대 의견이 부재한 순간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을는지 모른다. 작가는 그런데 이처럼 선택지가 부재한 곳에서 그리고 언어적 규칙이 규정하는 한계 너머에서 인간이 그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더 깊이 있는 차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처럼 언어적 소리의 혼성적 상황과 문자의 여백 공간에서 관습과 규칙이 제한할 수 없는 인간의 더 깊은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전우연 작가는 그러한 의미로 볼 때 작업에서 언어적 규칙에 따른 소리의 경계를 허물고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시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적 규범을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방식을 허무는 것일 수 있지만 작가는 그 무너진 체계에서 더 풍부한 형태로 주도적인 대화를 모색해 낼 수 있다고 보고 그의 작업에서 더 다양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아 보고자 한다. 전우연 작가의 작업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서 그리고 읽어낼 수 있는 문자의 여백에서 듣고 보게 되는 것들이 기존의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감지하는 범주를 너머의 여러 감각이 작동하게 만들 수 있고, 또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직관적 사유가 작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경직된 사회체계나 규범적 관습에서 벗어나 이와 같은 감각이 작동되는 시스템이 가능하게 될 때 인간 사이의 소통하는 질과 깊이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기존의 체계가 흔들리고 새로운 체계의 가능성이 발견되도록 일정한 균열을 가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실험의 장을 관객에게 제시해 보이고 있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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